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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 처녀

강원도

by 인정많은 아저씨 2014. 11. 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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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춘천. 소양2교 소양강처녀 노래비. 2014. 10. 28(화)

 

 

 

 

 

소양강 처녀

노래 김태희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태우는 소양강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오시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태우는 소양강처녀.
 
   달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 -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소양강 처녀’ 윤기순씨  

지금으로부터 45년을 거슬러 올라간 1968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명보극장 앞 네거리에서 을지로 3가 방향으로 한 10여m 내려가다 보면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동지회'라는 사무실이 있었다. 지금은 이 사무실이
등촌동으로 옮겨 가버렸지만, 당시는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주변이
스카라 계곡(예전에는 중대부속병원에서 을지로 3가 방향으로 가는 길에
남산에서 흘려 내리는 물로 계곡을 이루었으나 훗날 복개되어 현재에 이름)
이라고 불리우며 영화와 쇼, 그리고 가요에 관계된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정담을 피우던 그런 곳이었다. 

이 작가동지회 사무실에는 윤기순(尹基順)이라는 18세 소녀가 여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된 동기는 장차 가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쳇말로 그녀는 가수의 화려한 꿈을 안고 서울에 온 강원도 촌구석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가사를 돕는데 책임이 막중한 그런 소녀였다.

이런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인정파 젊은 가요작가
김종한 선생이 개인 레슨을 해주며 한을 풀어주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평소에 레슨비도 제대로 못내는 윤기순은 죄송스러워 어찌지 못하다가
한가지 묘안을 내어 스승인 김종한 선생을 비롯해서, 회장인 반야월 선생을
비롯해 작사가 고명기·류노완·월견초 선생 등을 자기의 고향인 소양강댐 상류에
초청했고, 고향집의 아버지도 자기 딸을 지도해 주는 서울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윤기순의 아버지는 소양강에서 민물고기(주로 빙어·잉어·붕어·장어 등)를 잡아
생계를 꾸려 가는 어부였다.
윤기순의 부모는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인다,
토종닭을 잡는다는 등 부산을 떨고 있을 때의 여가를 틈 타, 윤기순은 반야월
선생에게 "회장님. 저기 조그마한 갈대 숲 섬이 보이시지요. 거기 가면 아주
경치도 좋고 놀기도 좋아요. 우리 저 섬으로 놀러가요."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노는데에 일가견을 가진 그들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일행은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그야말로 시상(詩想)이 절로 떠오르는
주위 경치에 일행은 시상을 가다듬었다. 바로 이때였다. 청천벽력으로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오면서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왔다.
소나기 비바람이 몰아치며 잔잔하던 강 물결이 산천초목을 삼킬 듯이 일렁거리고
갈대 숲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나기에 흠뻑 젖은 윤기순이 "아이고 무서워!"하면서 반야월 선생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바람은 10여분간을 몰아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을 거두고 다시 해맑은
여름 햇살이 내려 쪼이는 변화무쌍의 심술을 부렸다.
일행은 다시 뭍으로 나와 젖은 옷을 말렸고, 반야월 선생은 이때의 느낀 감정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듬고 다듬어 <소양강 처녀>라는 가사를 만들었다.
 
1969년 봄, 반야월 선생은 이 가사를 가지고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방문하여
신곡으로 쓰라고 내어 주자, 회사 문예부의 상담역이던 작곡가 이호 선생은
자기가 작곡하겠다고 자청했다. 가사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악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노래에는 가수 지망생 중에서 김태희가 선택되었다.
당시는 음반 한장(보통 12곡)에 옴니버스 스타일이어 10여 명의 가수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12곡의 취입이 끝난 뒤 회사는 어느 곡을 타이틀곡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오아시스 전 직원을 모아놓고 노래를 들려준 후 무기명 투표로 타이틀곡(PR곡)을
결정하기로 했고 여기서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가 뽑혔다.
LP음반이 나오자 김태희(본명 박영옥)의 아버지는 답례로 반야월 선생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했다는 후일담도 있었고, 편곡은 박시춘 선생이 먼 친척 조카뻘이 되는
김태희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소양강 처녀>는 대 히트를 했다.
그녀는 〈소양강 처녀〉로 1970년도 가요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 톱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에서도 1O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기록, 가요계를 놀라게 했다.

 

소양강 처녀 가 세상에 나왔을때 춘천지역에서는 가사를 놓고 말이 많았다 한다.
두견새는 산새인데 물가에서 우는 물새냐. 더군다나 2절가서 동백꽃 피고지는
계절이 오면 이란 첫부분은 춘천을 너무 모르는 얘기다. 동백나무(꽃) 는 상록수로
우리나라 남단의 따뜻한 해변에서 피는 꽃이지, 강물이 꽁꽁 얼어붙는 소양강가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꽃이다… 등등. 굳이 따지자면 동백꽃은 중부지방 산쪽에서
자라는 동백나무와 흡사한 생강나무를 지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거나 말거나 지금 누가 일일이 가사의 정확성을 운운하며 노래를 부르는가?
그저 가슴에 와닿아 목청껏 불러제끼면 그것이 가요의 맛이 아닌가. 소양강 처녀의
곡은 매우 쉽다. 남성 여성을 불문하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고 어느 한 군데라도
어렵게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또 오래도록 사랑받는 곡의 가사가 그렇듯이
누가 들어도 웬지 자신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소양강 처녀 가 특별한 사연이나 줄거리를 가진 노래말이 아니면서도 가슴에
와닿는 것은 우리들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움의 연정 을 살살
흔들어 놓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세월은 무상한 것. 〈님과 함께〉가 그랬듯 세월이 지나면서
〈소양강처녀〉 역시 한때의 유행가로 남을뿐이었다. ‘가요무대’같은 프로에
다른 ‘흘러간 노래’들에 섞여 가끔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레퍼터리로
등장하는게 고작이었다.
김태희는 <소양강 처녀> 이후 이렇다 할 뚜렷한 후속곡을 내지 못하고
가요계 인기 대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1990년대 초반에 무려 2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노래방에서부터 소양강처녀 가 젊은층에까지 확산되며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는 김수희의 〈애모〉와 같이 옛 노래가 리바이벌 되어 뒤늦게 인기를 누리는
독특한 현상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노래방이 20년전에 죽은 노래를 되살린셈이다. 신세대 가수들의 랩뮤직 등이
장악하다시피한 가요계에 돌연 바람을 일으킨 철지난 트롯가요 〈소양강처녀>는
시대가 영웅을 만들 듯 히트곡도 때가 만든다’는 사실을 그대로 증명한 좋은 예다.
뭐니뭐니 해도 노래방은 1992년도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다. 부산에서 출발, 마산·창원 ·
대구 등을 거쳐 북상한 노래방이 서울에입성한 것은 1991년말 그러나 딱 1년 사이에
무려 1만 2천여개소(전국노래연습장협회중앙회 추정)로 늘어나
노래방’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노래방의 등장은 국민들의 여가 패턴을 크게 바꿔 놓았다. 술꾼들의 2차장소에서
청소년들의 휴식공간, 농부들의 모내기후 뒤풀이장소에 이르기 까지 노래방은 약방의
감초처럼 유흥의 필수코스로 정착되다시피 했다. ‘노래방 문화’는 야유희에서의
캠프 파이어란말도 없애 버렸다. 산과 들녘까지 노래 방 반주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위력을 등에 업고 덤으로 출세한 노래가 바로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다.
〈소양강 처녀〉는 노래연습장협회가 1992년 10월 조사한 노래방 인기곡 순위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지금도 노래방에서 10위안에 들것이다.
그러나 노래방이란 신어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소양강 처녀〉의주인공은
‘소양강 아줌마’로 국민들의 기억 저편에 있었다.
가수 김태희는 가수였다는 사실, 더나아가 〈소양강처녀〉를 부른 주인공이라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김태희는 기존 1, 2절에 3절을 추가하고
디스코 리듬으로편곡한 〈소양강처녀〉를 ‘김태희 회상앨범’ 이란 타이틀로 음반에 담아
내놓고 제2의 가수인생을 출발했다.
 
그런데 노래방이 왜 하필 〈소양강 처녀〉와 손을 잡았을까? 당연히 노래방을 찾는
손님들이 〈소양강 처녀〉를 많이 불러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왜 하고 많은 노래중에
노래방에만 가면 〈소양강처녀〉를 찾는 것일까? 가요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부르기 쉽다’는 데서
그 답을 찾는다.대개의 트롯 가요들이 그렇지만, 특히 이 노래는 곡이 단순하면서도 흥이나며
박자를 맞추기 쉽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듣기보다 부르기가 더 쉽고 좋다는 얘기다.
이는 방송을 자주 타는 애창곡과는다소 거리가 있지만 술자리나 특히 군부대 회식자리에서의
대표적 애창곡으로 지금까지 불려오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여기다 때마침 낭랑18세 를 부른 한서경이라는 상큼한 신인 여가수와 아네모네 를 부른
김재희등이 다시 편곡해 청소년들이좋아하는 랩스타일로 바꿔 불러 트롯곡임에도
애창가들의 연령분포를 파격적으로 넓혀 놓은 것도 한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노래방이 부르기 쉽고 점수 잘나오는 노래를 찾았고, 그부르기 좋은 노래중
대표로 뽑힌게 〈소양강 처녀〉인 셈이다. 노래방 에서 한 번이라도 시험해보라.
랩이나 발라드풍의 노래를 부르면 점수가 잘나오는지〈칠갑산〉이나 〈낭랑18세] 처럼
트로트 풍의 구성진 가요를 부르면 점수가 잘나오는지 쉽게 알수 있을것이다 
 
〈소양강처녀〉가 왜 느닷없이 애창곡 1위로 ’뛰어 올랐는가는 노래방이 왜 느닷없이
우리나라 성인이 한달에 2~4번은 가는 인기 장소가 됐는지와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어느 국민보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그이유를 우리 전통사회가
드물게 보는 억압적인 사회였기에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정서적으로

발산시키는 수법으로 노래가 이용됐다는 이론올 든다.한이나 원을 스스로 풀어야 하는

성격 때문에 우리 민족은 노래중에서도 독창이 발달했고 그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미친듯이 악을 쓸 수 있는 노래방이 폭발적 인기를 누린 것이다.
 
지금은 해저∼어문 소∼오양강에 황혼이 지이이∼면….’

‘소양강처녀’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소양강.
소양댐 건설후 호수에 편입되는 바람에 ‘외로운 갈대밭’이니

‘슬피우는 두견새’니 하는 노랫말속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도 물들어찬 계곡 주변의 거대한 호수 풍경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95년 춘천시에서는 작사가 반야월 선생을 초청했다.
춘천의 명소 소양강, 그리고 소양강 댐에 더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라도
<소양강 처녀>의 노래비를 세울 계획을 밝히고, 작사가로서
노래비 건립에 관한 자문을 요청해 왔다.
그리고 노랫말 중 "열아홉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의 모델이 된

주인공이 있다면 공개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고 한다.
 
반야월 선생은 스스럼없이 1968년 어느 여름날 소양강 상류 작은 섬에서
소나기를 맞는 순간 느꼈던 시심(詩心)과 사무실 직원 윤기순의 일화를 피력했다.
여기서 노래비와 배경에 소양강 소녀 동상도 만들기로 결정이 모아졌다
한데 현재 노래의 주인공이 된 윤기순의 행방이 묘연했다.
소양강 상류에 살고 있는 윤기순네는 이사를 가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춘천시에서는 경찰국에 협조를 의뢰, 전국적인 컴퓨터 조회 탐지로

윤기순이 광주시에 살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끝내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또한 가정 형편상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취입곡 하나 없는 한 많고 설움 많은 무명가수 윤미라로

광주의 야간업소에서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후 윤기순과 <소양강 처녀>에 얽힌 사연은 KBS-TV <이것이 인생이다>
시간을 통하여 방송(2000년)되기도 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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